Friday, May 18, 2012

임상수, 돈의 맛

3년 쯤 전 장난반 농담반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하루에 한 꼭지씩 써서 일년안에 출간 한다는 마음이었는데, 혼자서 큰 제목도 짓고 소제목도 짓고 한국 최고의 "하드 보일드 금융 액션 에로 소설"을 지향하며 일주일 정도는 결심한 대로 열심히 썼다.  내용은 단순했다.  트레이딩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한국판 조지 소로스인 주인공이 우연히 보수 언론사 사주의 치부를 알게 되는데, 알고 보니 어떤 재벌 기업의 불법상속과 연결되어 있다.  마침 미국의 서브 프라임 시장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돈을 벌게 된 주인공은 보수 언론사를 인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한 계획 없이 마치 장난삼아 진행된 신문사 인수는 재벌기업의 비자금과 결부되면서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신문사 인수에 성공한 주인공은 신문사의 논조를 서서히 바꿔 가는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보수 정당 유력자의 여자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녀는 살해당하고, 막후에서 주인공을 돕던 절친한 친구는 행방불명된다.  마침내 주인공의 반격이 시작된다. 

허접스러운 냄새가 풀풀 나는 소설은 역량과 시간부족으로 중단됐다.  생애 처음 써 본 소설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 썼다고 해도, 여러가지 문제(특히 에로부분의 선정성 때문에)로 출간은 어려웠을 것이다.  어제 임상수의 '돈의 맛'을 보고 든 생각은 임상수는 노무현도 한겨레도 검찰도 경찰도 그리고 내 소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것이었다.  옳은 척하고 잘난 척하고 군림하는 너희가 사실은 극히 찌질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도 굴복한 힘, 마치 세상 아무 것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그 힘에 대해서, 임상수는 너무나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이루어진 예술적 성취를 통해 그들을 완벽하게 모욕하는데 성공한다.  마치 생물학적 죽음만이 그들을 응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무력감이 극복되는 쾌감이 있다.  임상수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건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몇 번 다시 뽑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건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이 보여주는 영화적 사실성이 박정희에 대한 수 백 편의 정치학 논문 보다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때 그 사람'은 몇 가지 디테일 때문에 미완의 시도로 끝났지만, '돈의 맛'은 그것 보다는 훨씬 영리하게 영화를 끌고 간다.  임상수의 곤조와 예술적 재능에 박수.

하드 보일드 금융 액션 에로물

오늘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물기를 털어내고, 얼마전 원이가 준 크림슨 색 모자를 눌러썼다. 수영은 전문적인 수영선수가 아닌 이상, 정서적인 동기가 강한 운동이다.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수영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30분에 2킬로 미터 정도를 헤엄쳤다. 헤엄을 친다, 풀 사이드에 도달한다, 턴을 한다, 또 헤엄을 친다, 는 동작이 무한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깨닫는 것은 물안은 고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고요속에서 내 생각들은 끊임없이 산란하다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수영장과 도장은 그가 청춘을 보낸 곳이었다. 그는 몸을 쓰면서 자신과 남을 차별화했다. 그 몸의 차별성 위에 그는 자신의 정신 세계를 쌓아 올렸다.

준수는 엘리베이터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자 때문에 드리워진 얼굴의 음영 밑으로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그의 근육은 적당히 자극되어 있었고, 몸은 완벽한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발걸음은 천정이라도 뛰어오를 정도로 가벼웠다. 알 수 없는 에너지로 발산하는 기운으로 그의 몸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예금계좌는 이제 얼마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으로 넘쳐대고 있었다. 모든 주제에 대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눌 친구를 전화만 걸면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꾸미고 있는 일들은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그래도 넌 그 일을 할테냐. 준수는 거울의 자신에게 물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는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을 나오면서 준수는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1번 단추를 길게 눌렀다. 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너에게 전화 하려고 했어.
왜?
아무래도 저쪽에서 움직이는 거 같아. 당분간 몸조심하는 게 좋겠다.
안 그대로 요즘 누가 따라다니는 느낌이 들던데.
정말이야?
농담이야.

준수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신라일보와 보수당을 싫어했지만 그들을 특별히 악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냥 자기 욕심에 밝은 보통의 인간들이다, 라는 게 준수의 믿음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정말 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신라일보를 사들이고 말고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응징하고 제거하는 편이 빨랐을 것이다. 물론, 신라일보를 이런 식으로 몰래 사들이고 공격하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수는 그 위험에 대해서도 거의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대부분의 돈은 미국 금융 시장에서 번 돈이었다. 검찰이든 정치세력이든 아무리 공격할 거리를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매사에 조심스러운 재호는 달랐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재호의 극단적인 조심성을 준수는 언제나 존중했다. 그래서 자신과 재호가 전면에 나서는 일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제하자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가 듣지 않은 재호의 충고는 오직 하나, 그녀를 멀리 하라는 것 뿐이었다.

준수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의 회색 승용차가 주차된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곳곳에 CC TV가 설치된 스포츠 클럽의 지하 주차장이었고, 저렇게 눈에 띄게 모여있는 있는 것은 그게 누구든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려는데 저렇게 표시나게 모여서 누굴 기다리는다는 모습이 그냥 우습다고 넘어가기엔 개운치 않았다. 차를 타려면 준수는 그 앞을 지나야했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갖추고 일어났다. 누굴까. 준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운동을 한 녀석은 하나 뿐이었다. 대부분 둔하고 느려 보였다. 하지만, 다섯이었다. 그리고 모두 크고 작은 흉기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저런 걸 들고, 카메라가 즐비한 주차장에서 사람을 기다리다니 아무 생각이 없는 놈들이다. 웃으며 말했다.

차를 빼야 하니 비켜 주시겠어요?

갑자기 맨앞에 선 녀석의 주먹이 날아 들었다. 주먹을 휘드르는 모습이 제대로 훈련 받은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세게 때리라고 하면 주먹을 뒤로 빼고 힘을 줘서 크게 휘드른다. 그렇게 큰 자세로 긴장까지 하게 되면, 아무리 세게 때리는 것 같아도 전혀 타격을 줄 수 없다. 준수는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중심을 유지한 채 짧게 끊어서 주먹으로 양미간을 때렸다.
너희가 뭐하는 넘인지, 누군인지 모르겠다만. 너희 같은 놈들에게 시간을 허비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준수는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의식을 단전으로 모았다. 기운이 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횡과 종으로 나란히 서 있는 차를 방패삼아 등지고 남은 네 명을 주차장 가운데로 끌어냈다.

모두 한번에 끝내야 한다. 한방에 하나씩. 그리고 센 넘을 가장 먼저.

맨앞에 선 녀석과의 거리를 계산하면서 앞으로 두 번 연속으로 뛰었다. 양 옆의 두 놈이 고함을 지르며 양쪽에서 동시에 달려 들었다. 왼발로 낭심을 걷어차고 뛰어 오르며 오른 발등으로 얼굴을 걷어찼다. 발등으로 얼굴이 감겨오더니 녀석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자기 발로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내려다 보았다. 눈에 흰 자위를 드러낸 채 손발을 떨고 있는게 보였다. 머리를 드니 뒤에 서있는 녀석이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쪽으로 달려 가려는 순간, 오른쪽으로 서늘한 기분이 느껴지며 새하얀 칼날이 번득였다.

이런 순간이 가장 자극적이다.

고등학교 시절 준수와 함께 운동했던 성운형은 언젠가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2를 보고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성룡의 눈 앞에서 총으로 위협한다는 게 말이 돼? 나는 무술가의 발보다 총알보다 빠르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총을 쏘겠다고 생각하는 데 걸린 시간과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감안하면 자신의 발이 반응하는 것보다 절대 빠를 수 없다는 게 성운형의 주장이었다. 일대일의 대결에서 어떤 무기를 든 사람보다 성운형의 발은 빨랐다. 준수는 그게 성운형의 발이 총알보다도 칼보다도 빠르기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게 성업형의 머리 때문이란 걸 알겠됐다. 머리 속도는 총알의 속도보다 빠르다. 머리는 총알보다 빠르고, 발차기는 머리 만큼이나 빠르던 성운형은 결국 재작년 북경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지르는 발이 보이지 않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인 감각만이 지배하는 순간. 이런 순간에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때가 온다. 준수는 그 시간을 잘게 쪼개서 그 칼날 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흘낏 바라보고 오른 주먹으로 녀석의 우미혈을 내질렀다. 주먹에 느끼는 무뚝뚝한 촉감.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손바닥 밑으로 녀석의 대동맥을 내리쳤다. 몸을 보니 그나마 훈련이 되어 있는 녀석 같아서 두 번이나 확실하게 보내고 싶었다. 이렇게 대동맥을 내리치면 적어도 한 나절 동안은 일어날 수 없다. 일어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제 나머지 녀석들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갑자기 한 녀석이 옆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따라가면서 뒷꿈치를 살짝 밟았더니 놀라 쓰러졌다. 쓰러진 얼굴에 비굴한 표정이 떠오른다. 이런 순간이 가장 싫다. 저질스런 인간이 만드는 표정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비슷하다. 그래도 끝까지 오른 손에 쥔 칼을 놓을 줄 모른다. 준수는 인대의 위치를 감안해서 무릎을 밟았다.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일주일쯤은 지나야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턱밑을 걷어찼다.

이런 녀석들이라면, 내가 물어도 누가 보냈는지 대답도 못해줄 거다.

준수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까 듣던 키신이 연주하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이 큰 소리로 정적을 깼다. 급하게 볼륨을 줄이며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재호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안전벨트 줄을 당겼다. 다른 한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오른 편에서 흰색 SUV가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싶었던 준수가 더 빠르게 엑셀을 밟으려는 순간 차의 오른쪽이 무너지면서 준수는 왼쪽 창문에 얼굴을 부딪혔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북경에서 죽은 성운형이 생각났다.

7 comments:

  1. 요즘 시류에 맞는 스토리네요.
    임상수 감독한번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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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설 재밌을 것 같아요. 근데 영화를 좋아하셔서인지, 살짝 소설보단 활자화한 영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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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소설 재미있어요. 군데군데 드러나는 hubris님의 식견이 너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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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집필중인 책 마치신 이후에, 소설도 완성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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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고편이군요. 여기서 연재하시다가 임감독에게 돈맛 2편용으로 판권도 파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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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소설 주인공이 제 이름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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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익명s/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댓글 달지 않은 분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제 식구들 반응과 비슷할 듯 하네요.

    curativity/
    에로 부분을 읽으시면 감정이입 많이 되시겠네요.^^ 올리진 않겠습니다. 너무 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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